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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8. 17:55

<냉전(Cold War, 2018)> 카테고리 없음2019. 2. 8. 17:55

_ 흘러가는 시간 그 자체가 주인공인 것 같다(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폴란드의 민속 음악으로 시작해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연주로 끝나는 음악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시대의 음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므로 패스...).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90분 동안 다룬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년도에서 다음 년도로 꽤 거칠게 넘어가고, 그렇게 넘어가면서 자잘한 디테일이 생략되고 인물들의 서사는 종종 끊긴다는 인상을 준다. 결정적으로 1959년의 수용소. 어떻게 그 수용소로 넘어갔는지 두루뭉술하게 설명은 하지만 너무 급작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_ 모든 장면이 엄정하게 찍혀있다. 조명과 구도, 인물 배치 등 모든 것이 숨 막힐 정도다. 이 프레임이 흘러가는 시간, 시대 속 인물들을 억누르고 있고, 그렇기에 마지막에 반대편이 더 잘 보인다고 하며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 억누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도식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장면 직전에 교회에서 둘 만의 결혼식을 하며(줄라는 중반부에 이탈리아인과 결혼해서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결혼은 교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효라는 말을 한다) 약을 먹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는 보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은 죽어서야 이 프레임 밖을 벗어날 수 있는 건데, 그렇게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 후에 살짝 불어오는 바람이 이 영화의 잔상을 만든다. 


_ 프레임 관련해서 한 가지. 보는 내내 빅토르와 줄리는 프레임 안에서 불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모든 장면에서 그들의 얼굴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을 넘어서, 인물이 위치한 전경과 후경의 배경이 분리되어 있는 거 같았달까. 교차로에 앉아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인물이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하고 찍은 후 합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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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2018. 12. 29. 22:03

2018년 카테고리 없음2018. 12. 29. 22:03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오면서 올 해는 많은 것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역시 그랬고, 앞으로 적응해야하는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근데 여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익숙함의 떠나보냄이 있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새로운 무언가가 향후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 간의 길을 만들어버렸다. 도대체 어떤 길로 가야하는가 매년 고민하고 고민에서 그쳐버리는 것을 반복해왔지만, 이렇게 뜻밖에, 예상치 못하게 어떤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어쨌든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고 앞으로 이 길을 걸어가게 됐는데,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있을지 잘 모르겠다. 여러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정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를 많이 생각했던 한 해였다. 내년에는 알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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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2018. 11. 20. 17:26

이 분이 와서 공연한다는데 카테고리 없음2018. 11. 20. 17:26

돈도 없고 시간도 안 되어서 몹시 슬프다. 그러고 보니 이런 유명한 연주자들의 독주회를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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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자꾸 그 시간이 눈에 보일 때, 그리고 그 시간과 지금 내가 있는 시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여 그 시간으로 넘어갈 수 없음을 다시 자각하며 결국 그 시간으로부터 발길을 돌릴 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그 감정은 단순히 아련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것이다. 언제까지 그 시간이 눈에 보일까. 아니, 언제까지 그 시간이 눈에 보이더라도 초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시간은 더 이상 나의 시간이, 내게 속할 수 없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서 지나간 시간인데 언제까지 그 시간 안에서 더 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와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만 할까. 그 시간이 나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갔고, 나를 조금이나마 살려냈지만 그 시간은 지금의 나에겐 더 이상 현재가 아니다. 그저 잠시 '나에게 그 시간이 있었지...' 정도의 추억을 하는 것으로 족할 줄 알아야하거늘, 그 시간을 바탕으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더 충실할 줄 알아야하거늘 (그러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뒤를 돌아보며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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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2018. 11. 16. 16:12

영화 단상 카테고리 없음2018. 11. 16. 16:12

키아로스타미의 초기작 <보고서>의 후반에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마흐메드가 짐 싸들고 나가려고 하는 아내를 문 앞에서 저지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마흐메드가 문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멀쩡하던 문의 창문이 아내를 굴복시킨(더 정확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후에 보면 깨져있다. 저지하는 순간에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그럼 대체 창문이 언제 깨진 것일까.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아이의 울음 소리가 덮어버렸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건 창문이 깨졌다는 걸 마흐메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흐메드가 신경쓰는 것이 있을까. 가정이 유지되는 것 말고는 그가 신경쓰는 것은 없어보인다. 그가 뇌물을 받으려고 했다는 혐의에 항의하면서도 일시 정직을 받은 후 그는 더 이상 그쪽으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살고 있는 집에서 나가라는 퇴거장을 받아도 그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논쟁이 벌어져도 하거나 말거나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약을 먹은 아내가 무사할 것임을 확인한 후에 그는 더 이상 아내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영화는 그 신경 쓰지 않음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당대의 시대를 반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내가 입원한 상태에서 그녀가 아직 깨지 않았음에도)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나는 그가 이후에도 이 '신경 쓰지 않음'을 계속 이어갈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리막이 있으면 새벽의 여명과 같은 오르막도 있지 않을까" 같은 한 줄 평은 이 영화를 오독한 게 아닐까. 적어도 영화 안에서의 마흐메드의 삶에는 내리막이 없었다. 가정의 불화는 이미 고발과 임시 정직을 당하고 퇴거장을 받기 전부터 존재했고, 임시 정직을 받았지만 그 고발로 인해 그가 완전히 직장을 잃었다는 건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약자에게 강압적이고, 그걸 제외하고는 무덤덤한 그의 태도만을 보여줄 뿐이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올 해 본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임과 동시에 가장 화가 나는 영화였다. 전편을 보며 아 그래도 이건 좋았지 싶었던 것은 산산히 박살났거나 축소되었고, 조니 뎁은 쓸데 없이 많이 나오고, 영화 전체는 정말 쓸데 없는 TMI로 범벅하고 그저 다음 편을 위한 예고편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크레덴스가 덤블도어의 동생이라는 정보 하나 알려주기 위해 만든 영화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덤블도어의 성정체성이라던가 엑스맨에서 가져온 것이 명백해보이는 대결 구도의 예고라던가 21세기의 관객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임을 알고 있는 것을 이미지화해서 과거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 합당한 논리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쓰는 것 등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이 기본기도 안 된 영화를 보며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지는 않다. <토르 : 라그나로크>의 클라이막스에서 앞, 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편집을 보며 어이가 없었는데,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조앤 롤링은 애초에 믿을 게 못 되었지만, 데이빗 예이츠가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다 떨어지는 마법 영화를 만들 사람은 아닌데 좀 놀랐다. 타의로 봤지만 다음 편부터는 자의로던 타의로던 볼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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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2018. 11. 13. 10:42

이게 뭐냐 카테고리 없음2018. 11. 13. 10:42

포켓몬스터 팬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몇몇 포켓몬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한 정도?).. 예고편으로 본 첫 인상은 가히 충격과 공포다. 이게 대체 뭐냐. 피카츄를 털인형으로 만들어버린 걸로도 모자라서 라이언 레이놀즈의 데드풀스러운 목소리와 아재농담이 들어가니 포켓몬 실사 영화보다는 차라리 <테드(Ted, 2012)>에 가까운 영화로 보인다. 하긴 라이언 레이놀즈가 실사판 포켓몬 영화에서 피카츄 목소리를 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대체 뭐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제목을 <탐정 피카츄>로 지은 것 치고는(피카츄만 나오는 줄..) 다양한 포켓몬이 나와서 놀랐는데, 문득 이거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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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2018. 11. 12. 16:12

2018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카테고리 없음2018. 11. 12. 16:12

1. 더 포스트

2. 사령혼

3. 바람의 저편

= 얼굴들, 마을들

= 이미지 책

= 풀잎들

7. 만비키 가족

= 버스터 스크루지의 발라드

= 개들의 섬

= 클레어의 카메라

= 유령의 실

= 너는 여기에 없었다

13. 행복한 라짜로

= 강호아녀

= 레디 플레이어 원

= 소공녀

= 하이 라이프

= 로마

= 미주리 주 어빙 외곽의 세 입간판

= 백두 번째 구름

= 녹차의 중력

= 버닝


재미 없는 리스트지만, 개별 리스트를 취합한 결과는 기본적으로 인기 투표, 많이 이야기되었거나 많이 본 것으로 채워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별 불만은 없다. 다만 (개별 리스트에서는 그런 인상이 덜하지만 전체 리스트를 보니) 영화 기자/평론가들이 개봉작 열심히 챙겨보고 그 와중에 부산국제영화제만 갔나 싶은 생각이 드는 리스트다. 하반기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공개될 예정인) 영화들 중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만 올라온 것(어째서 아무도 <사생활>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냐!),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중 단 한 편도 최종 리스트에 들어오지 못한 것 -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첫 공개된 키아로스타미의 유작이 단 한 표도 얻지 못한 것이 충격이다 - 을 보면 말이다.


<버닝>이 고작 3표 밖에 얻지 못한 것이 의아스럽지만(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지지하는 평자들이 이보다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 <개들의 섬>이 4표를 받은 게 더 의아스럽다. 웨스 앤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프레임과 세공력을 제외하고는 지지할 구석이 없는 영화였는데... 올 해 개봉한 두 편의 홍상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평자가 거의 없었는데 연말에 이렇게 많은 득표를 받아서 놀랐고 러닝타임의 장벽 때문에 본 평자가 얼마 없을 거 같았던 <사령혼>이 2위인 것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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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

원 글은 여기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를 애도하는 글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중 몹시 불편했던 글이 오래 남았다. 매우 따뜻한 마음과 정의감이 엿보이는 글이지만 왜 불편함을 줄까 생각했다. 글쓴이는 유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애도하는 대상과 자신을 함부로 동일시하는 태도가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이 아마 ‘공감’으로 읽히나 보다. 나 역시 공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공감은 때로 폭력의 얼굴로 등장한다.


진정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연대하고자 한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주체를 함부로 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윤리적인가. 이 질문이 계속 맴돈다. 타인의 고통을 글의 재료로 삼아 궁극에는 자기 자신에게 사람들을 주목시키는 행동이다. 나 자신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여 타인의 서사를 잡아먹는다.


글쓰기를 미화하거나 심지어 신비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글쓰기는 많은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글쓰기는 자아도취의 끝없는 향연을 펼칠 수 있는 장이며 타인을 짓밟을 수도 있는 강력한 무기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이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글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얼핏 정의로워 보이지만 고통의 주체마저 바꿔치기할 수 있다. 고통의 주체는 발화자 혹은 목격자가 되고 정작 고통받은 타인은 이 발화자 혹은 목격자의 정의감을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소재’가 되고 만다. 누군가의 비극을 내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살해된 피해자의 몸을 의사가 불특정 다수에게 언어로 상세히 전달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참혹함의 정도를 묘사하면 사실에 접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은 자극과 선동으로 향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그 고통을 대하는 윤리를 압도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은 소외된다. 사실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사실적인’ 묘사에 자극받는다. 묘사를 사유라고 착각하여 치밀하게 묘사할수록 치열하게 사유했다고 여긴다. 타인의 고통 위에 나의 목소리를 덮어씌우는 행동과 타인의 고통이 내 목소리와 연결되도록 하는 행동은 다르다.


한 사회 지성과 윤리의 척도는 애도와 유머를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타인과 슬픔을 공유하는 태도, 타인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태도에 깃든 윤리의식은 첨예한 지성의 분투를 필요로 한다. 유머, 곧 해학, 풍자, 농담 등이 사회의 약자를 조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도가 육체적 고통의 흔적을 낱낱이 묘사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면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재현의 윤리에 대한 언급조차 너무 부담스럽다. 타인의 고통을 미학화하는 행동에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그 시선들 때문에. 누구나 관음의 욕망이 있다는 옹호의 목소리 때문에. 만인이 작가인 시대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직업윤리를 집어삼키는 일이 벌어진다. 착각과 달리, 전위적인 지성과 미학은 윤리적 고민을 품고 있다.


셀피를 찍어대듯, 오늘날은 ‘나’를 들여다보는 ‘나’들에게 집중한다. 내가 불쌍하고 내가 괴로워서 그따위 윤리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 살인 사건 피의자의 얼굴 공개는 안타깝게 희생된 한 사람에 대한 애도와 무관하며 사건 수사와도 무관하다. 오직 ‘나’의 분노를 표출할 구체적 과녁으로 작용할 뿐이다.


생각이 많아지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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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