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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16. 16:12

영화 단상 카테고리 없음2018. 11. 16. 16:12

키아로스타미의 초기작 <보고서>의 후반에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마흐메드가 짐 싸들고 나가려고 하는 아내를 문 앞에서 저지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마흐메드가 문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멀쩡하던 문의 창문이 아내를 굴복시킨(더 정확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후에 보면 깨져있다. 저지하는 순간에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그럼 대체 창문이 언제 깨진 것일까.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아이의 울음 소리가 덮어버렸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건 창문이 깨졌다는 걸 마흐메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흐메드가 신경쓰는 것이 있을까. 가정이 유지되는 것 말고는 그가 신경쓰는 것은 없어보인다. 그가 뇌물을 받으려고 했다는 혐의에 항의하면서도 일시 정직을 받은 후 그는 더 이상 그쪽으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살고 있는 집에서 나가라는 퇴거장을 받아도 그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논쟁이 벌어져도 하거나 말거나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약을 먹은 아내가 무사할 것임을 확인한 후에 그는 더 이상 아내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영화는 그 신경 쓰지 않음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당대의 시대를 반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내가 입원한 상태에서 그녀가 아직 깨지 않았음에도)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나는 그가 이후에도 이 '신경 쓰지 않음'을 계속 이어갈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리막이 있으면 새벽의 여명과 같은 오르막도 있지 않을까" 같은 한 줄 평은 이 영화를 오독한 게 아닐까. 적어도 영화 안에서의 마흐메드의 삶에는 내리막이 없었다. 가정의 불화는 이미 고발과 임시 정직을 당하고 퇴거장을 받기 전부터 존재했고, 임시 정직을 받았지만 그 고발로 인해 그가 완전히 직장을 잃었다는 건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약자에게 강압적이고, 그걸 제외하고는 무덤덤한 그의 태도만을 보여줄 뿐이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올 해 본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임과 동시에 가장 화가 나는 영화였다. 전편을 보며 아 그래도 이건 좋았지 싶었던 것은 산산히 박살났거나 축소되었고, 조니 뎁은 쓸데 없이 많이 나오고, 영화 전체는 정말 쓸데 없는 TMI로 범벅하고 그저 다음 편을 위한 예고편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크레덴스가 덤블도어의 동생이라는 정보 하나 알려주기 위해 만든 영화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덤블도어의 성정체성이라던가 엑스맨에서 가져온 것이 명백해보이는 대결 구도의 예고라던가 21세기의 관객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임을 알고 있는 것을 이미지화해서 과거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 합당한 논리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쓰는 것 등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이 기본기도 안 된 영화를 보며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지는 않다. <토르 : 라그나로크>의 클라이막스에서 앞, 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편집을 보며 어이가 없었는데,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조앤 롤링은 애초에 믿을 게 못 되었지만, 데이빗 예이츠가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다 떨어지는 마법 영화를 만들 사람은 아닌데 좀 놀랐다. 타의로 봤지만 다음 편부터는 자의로던 타의로던 볼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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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틴노마드